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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여자)
프란츠의 아버지가 느닷없이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 어느 날 문득 어머니 혼자 남게 되었던 것은 그의 나이가 열두 살쯤 되었을 때였다. 프란츠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고 의심했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평범하고 차분한 말투로 비극을 감추었다. 시내를 한바퀴 돌자고 아파트를 나오는 순간, 프란츠는 어머니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당황했고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두려웠다. 그는 어머니의 발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두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걸어야 했다. 그가 고통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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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배신)
그러나 B를 위해 A를 배신했는데, 다시 B를 배신한다 해서 A와 화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혼한 여자 예술가의 삶은 배신당한 그녀 부모의 삶과는 닮지 않았다. 첫번째 배신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첫번째 배신은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들을 야기하며, 그 하나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 부터 우리를 점점 먼 곳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제 5부 가벼움과 무거움

이미 말했듯 소설의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문장, 그리고 작가가 생각하기에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언급되지 않았던, 근본적 인간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메타포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마당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것 : 사랑이 고조된 순간 뱃속에서 끈질기에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 : 배신하고 또한 이토록 아름다운 배신의 길 중간에서 멈출 수 없는 것 : 대장정의 행렬 속에서 주먹을 치켜드는 것 : 경찰이 숨겨둔 도청 마이크 앞에서 유머 감각을 과시하는 것 등. 나도 이런 상황을 겪어 보았다. 그러나 나의 이력서 상의 내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내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해 갔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바로 이 경계선(그 너머에서 나의 자아가 끝나는)이 나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 속에서 인간적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제 6부 대장정

최근에 와서도 책 속에서 똥이란 단어가 점선으로 대치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물리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똥이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노릇이 아닌가! 똥과의 불화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배설의 순간은 창조에 있어서 수락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일상적 증거이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 똥은 수락할 만한 것이다, 라거나(그렇다면 화장실 문을 잠그고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또는 우리가 창조된 방식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 중에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란, 똥이 부정되고, 각자가 마치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신하는 세계를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이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상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에 퍼졌던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에서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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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물론 키치에 의해 유발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감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키치는 과감한 짓을 할 수 밖에 없다 : 키치는 인간의 기억력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적 이미지에 호소한다 :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키치는 백발백중 두 방울의 감동적 눈물을 흘리게 한다. 첫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다워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번째 눈물에 의해서이다.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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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가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잡게 된다. 키치가 권위적인 힘을 상실하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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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하는지에 따라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익명의 무수한 시선,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시선을 추구한다. 독일 가수와 미국 여배우가 이런 경우에 속하며 주걱턱의 신문기자 역시 이런 경우에 속한다. 독자들에게 익숙해져서 그의 주간지가 소련인에게 정간당하자, 그는 백 배나 산소가 희박해진 공기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는 누구도 수 많은 미지의 시선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는 곳마다 경찰의 미행을 받고, 전화를 걸 때마다 도청당하고, 심지어는 거리에서 은밀하게 사진까지 찍힌다는 사실을 알았다. 갑자기 익명의 시선이 도처에서 그를 따라 다녔으며, 그러자 그는 숨을 쉴 수 있었따! 그는 행복했다! 그는 연극배우 같은 목소리로 벽에 숨겨진 소형 마이크에 대고 소리치곤 했다. 그는 경찰 속에서 잃어버린 관객을 되찾은 것이다.
두번째 범주에는 다수의 친숙한 사람들의 시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속한다. 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칵테일 파티나 만츤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중을 잃으면 그들 인생의 무대에 불이 꺼졌다고 상상하는 첫번째 범주의 사람들 보다는 행복하다. 반면 두번째 범주의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시선을 획득하는데, 마리클로드와 그녀의 딸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세번째 범주가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의 조건은 첫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그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감기면 무대는 칠흑 속에 빠질 것이다. 테레사와 토마스를 이런 사람들 속에 분류해야만 한다.
끝으로 아주 드문 네번째 범주가 있는데,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몽상가이다. 예를 들면 프란츠가 그렇다. 그가 캄보디아 국경까지 간 것은 오로지 사비나 때문이다. 버스가 태국의 도로에서 덜컹거릴 때, 그는 그녀의 시선이 오랫동안 그에게 고정되었다고 느낀다.
토마스의 아들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나는 그의 이름을 시몽이라 부르겠다(그는 아버지처럼 성서에 나온 인물의 이름을 가졌다고 기뻐할 것이다). 그가 희구하는 시선은 토마스의 시선이다. 서명 캠페인에 연루되는 바람에 그는 대학에서 내쫒겼다. 그가 교제하던 젊은 여자는 시골 신부의 조카딸이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여 집단 농장의 트랙터 운전사,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토마스도 시골에 사는 것을 알자 기뻐했다. 운명이 그들의 삶을 대칭적으로 만들었다고! 그것 때문에 그는 토마스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는 답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 토마스가 그의 삶에 시선을 보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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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쿤데라 할부지.
키치 속의 키치.
너와 나의 키치.
당신의 키치와 나의 키치가 만들어내는 키치.

가벼움과 무거움.
제목에서 부터 오는 극단적인 키치로 감춘 적나라함.

2006.9.19. 12:32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