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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여행자

로마를 뒤로 하고 스위스로 넘어가던 날. 


낡은 쿠셋의 아늑한 불빛, 창문에 서린 서리, 창틀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차가운 쇳조각 냄새와 
달리는 열차를 따라 배웅하듯 낮게 엎드린 산그림자까지.
그 밤의 창 밖 풍경은 30일간의 유럽여행 중 가장 외로웠고, 설레였다.


이른 아침. 누군가가 인내심있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팔자 무늬 콧털을 가진 승무원이 엄지손가락을 뒤로 젖히며, 역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맙소사... 정신없이 놓치는 짐이 없나 확인하고 내리려는데 지도에 동일한 기차역 이름이 2곳이지 않는가.
시간이 아까운 여행자로서 제 시각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수시간 혹은 수일을 날릴수도 있었다.
내딴에는 어마어마한 고민과 선택의 기로였던 그 찰나의 시간...

김빠지게도 나는 그 때의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왜 이 나라의 우울증 환자가 많은지, 왜 오후 2시의 자살율이 높은건지에 대해 공감이 갈만큼
평화롭고 정지된 듯한 스위스의 시간은 내가 제때 역에 내린 것인지 헤맨것인지 따위는 
시간의 개념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그 지루한 시간들은 나에게 새로운 오감능력을 주었다.
라운지의 soccer table을 응시 할 때, 잔디밭에 누워있을 때, 심지어 시민공원에서 비둘기를 마주칠 때 조차
이제까지 내가 들이쉬고 내쉬던 공기가 새삼스럽게 온 몸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아채듯
나는 사물의 형태, 색감, 냄새, 소리를 하나하나 느릿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학생들과 함께 허름한 유스호스텔에 묵는 어느 노부부의 맞잡은 손에서
30년 뒤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미래를 보았고,

그늘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나의 손등과
양지바른 잔디밭에서 브래지어 끈을 풀고 엎드린 백인의 주근깨 등을 보며
인종이 다르다는 것에 대해 실감 할 수 있었다.

잔디밭의 뾰족한 풀잎 끝마다 태양을 향해 활짝 편 기지개에서
너도 나도 모든 것이 다 살아있다는, 알 수 없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그 때 그 역에서 내렸던가. 아니면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다음역 까지 갔었던가.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 달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멈추거나 혹은 느리게 걸으며 내가 얼만큼 왔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한 번씩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이는 현 직장에서의 새로운 업무일 수도 있고, 상위 직급으로의 승진일 수도 있으며,
전혀 새로운 직업, 독립을 향한 발걸음 또는 일시적인 하차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세상 또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터득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